대체로 진실로 선을 좋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말하길, ‘으쓱거릴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리니, 으쓱거리는 음성과 얼굴빛은 사람을 천 리의 밖에서 막는다. 선비가 천 리의 밖에서 멈춘다면 참소하고 아첨하고 면전에서 아부하는 사람이 이를 것이니, 참소하고 아첨하고 면전에서 아부하는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면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한들 할 수 있겠는가?”
남자와 여자로서 아직 관례를 하지 않았거나 비녀를 꽂지 않은 자는 닭이 처음 울면 모두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빗질을 하고 치포관을 치며, 머리에 먼지를 털며, 뿔모양으로 머리를 묶으며, 향주머니를 매어 모두 향주머니를 차며, 날이 밝으려고 하나 아직 어두운 때에 (부모님을) 뵙고 무엇을 드시고 싶어 하시는 지를 여쭈어서, 만약 이미 드셨으면 물러나오고, 만약 아직 드시지 않으셨으면 나이 많은 사람을 도와서 준비하는 것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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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曰 若有疾風迅雷甚雨어든則必變하여 雖夜나 必興하여 衣服冠而坐니라<小學, 敬身第三>
예기에 말하였다. 만약 세찬# 바람과 맹렬한# 우레와 심한 비가 있으면 반드시 (얼굴빛을) 변하여 비록 밤이라도 반드시 일어나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아 있는다.
만약 어버이의 옛 친구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힘을 다하여 초청하여 이르게 하며, 손님을 받들기를 마땅히 힘을 다하여 계획하고 장만하여 힘써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일삼고 집안의 있고 없고를 따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또 응당 (그가) 자신이 힘쓰고 힘써 애쓰고 수고로운 것을 알지 않게 해야 하니, 만약 그 함에 쉽지 않음을 보게 되면, 또한 편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있는 오지방 가운데 종족이 매우 많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가깝고 멂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 조상이 (그를) 보면 똑같은 이 자식과 손자이니, 본래 가깝고 멂이 없다. 진실로 조상의 뜻에 가깝고 멂이 없다면, 굶주리고 추워하는 사람을 내 어찌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상으로부터 이래로 덕을 쌓은 지 백여 년만에 비로소 나에게서 발하여 큰 벼슬에 이를 수 있었으니, 만약 홀로 부유함과 귀함을 누리고 종족을 구제하지 않으면 다른 날에 어떻게 그것으로 지하에서 조상을 볼 수 있겠으며, 이제 무슨 낯으로 집안의 사당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에 은혜로운 대우와 녹봉과 하사받은 것을 항상 집안사람들에게 고루 주고 아울러 의로운 밭과 집을 설치하였다.
장공예는 9대가 함께 지내니, 북제와 수나라, 당나라에서 모두 그의 문에 정표하였다. 인덕 연간에 고종이 태산에 봉제사를 지내고 그 집에 행차하여 공예를 불러 보고는 그가 이로써 종족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바의 도를 물었다. 공예가 종이와 붓으로 대답겠다고 청하고는 마침내 ‘참을 인‘자 백여 번을 써서 올렸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종족이 화목하지 않은 까닭은 존장의 옷과 음식에 혹 고르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며, 낮고 어린 사람의 예절이 혹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며, 번갈아가며 서로 책망하여 마침내 어긋나고 다투게 되기 때문이니, 진실로 서로 더불어 (그것을) 참을 수 있다면 집안의 도가 화목할 것입니다.’
첫째. 뜻을 세우는 것에 대한 글: 처음 배우는 사람은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이 될 것으로 스스로 기약하여, 한 가닥의 털 만큼도 스스로 작다 여기고 물러나 핑계 대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대체로 중인과 성인이 그 본성은 한가지이다. 비록 기질은 맑고 흐리고 순수하고 섞임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나, 만약 참되게 알고 실천할 수 있어서 그 옛날에 물든 것을 버리고 그 본성의 처음을 회복한다면, 털끝만큼을 보태지 않더라도 온갖 선이 두루 갖추어질 것이니, 중인들이 어찌 성인을 스스로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맹자는 ‘〈인간은〉 본성이 선(善)하다’고 말하되 반드시 요임금과 순임금을 일컬어서 그것을 실증하며 말하길 ‘사람은 모두 그 때문에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시니,〉 어찌 나를 속였겠는가?
무릇 사람들이 스스로 ‘뜻을 세웠다’고 말하되, 곧바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머뭇거리며 기다리는 것은 명분으로는 뜻을 세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배움을 향한 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뜻으로 하여금 진실로 배움에 있게 한다면 인을 행하는 일은 자기에게 말미암는다. 인(仁)을 하고자 하면 〈인에〉 이를 것이니 어찌 남에게서 구하며 어찌 뒷날을 기다리겠는가? 입지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입지로써〉 바로 공부에 착수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 항상 생각하고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혹시라도 뜻이 성실하거나 독실하지 못하여 답습하는 것으로 세월만 보낸다면 수명을 다하여 세상을 마친들 어찌 성취하는 바가 있겠는가?
만일 〈남편이〉 엄숙함으로 〈집안의 사람을〉 대하여 하늘의 굳건한 도를 체득(體得)할 수 있고, 〈아내가〉 부드러움으로 〈집안의 사람을〉 바로잡아서, 땅의 순(順)한 의를 받들 〈수 있다〉면 집을 이끄는 도리[家道]가 바를 것이지만, 이와 반대로, 남편이 오로지 제어를 하지 못하여 〈집안〉 다스림에 올바른 도리를 쓰지 못하고, 아내가 그 남편의 〈잘못을〉 틈타서 〈남편〉 섬김에 올바른 의리를 쓰지 못하여 세 가지 〈아내가〉 따라야 할 도[三從之道]에 어둡고, 일곱가지 〈아내를〉 내치는 악행이 있다면, 집안의 도리가 다하게 될 것이다.
아! 그 사람의 행실이 선한지 선하지 않은지 살펴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이 효도하는지 효도하지 않는지 볼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 부모에게 효도한다면 그 효도를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친구에 미루어 봄에, 어디에 대입한들 옳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효도는 사람에게 중대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고원하여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