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악성제수훈(東嶽聖帝垂訓)》에 말하였다. “하루라도 선을 행하면, 복은 비록 이르지 않더라도 재앙은 저절로 멀어질 것이요, 하루라도 악을 행하면, 재앙은 비록 이르지 않더라도 복이 저절로 멀어질 것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봄 동산의 풀과 같아서 그 풀의 성장을 보지 않더라도 날로 더해지는 바가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돌과 같아서 그 칼의 줄어듬을 보지 않더라도 날로 닳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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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蘇曰 一言之益은 重於千金이요 一行之虧는 毒如蛇蝎이라<[新編]明心寶鑑, 中國篇>
무소가 말하였다. “한 마디 말의 이로움은 천금보다 무겁고, 한 가지 행동의 잘못은 독사나 전갈과 같이 독하다.”
휘종황제(徽宗皇帝)가 말하였다. “배우는 자는 곡식과 같고 벼와 같으며, 배우지 않은 자는 쑥과 같고 풀과 같다. 곡식과 같고 벼와 같은 것은 나라의 좋은 양식이고, 세상의 큰 보물이다. 쑥과 같고 풀과 같은 것은 농사짓는 자가 미워하고, 김매는 자가 괴로워한다. 훗날에 담장을 마주한 때는 후회한들 이미 늙었도다.”
형제는 부모가 남겨준 몸을 함께 받았으니, 나와 한 몸과 같다. 형제를 볼 때 마땅히 서로의 구분이 없게 하여, 음식과 의복의 가진 것을 모두 마땅히 함께해야 한다. 만약 형은 굶는데 동생은 배불리 먹고, 동생은 추운데 형은 따뜻하다면, 이는 한 몸의 안에서 몸의 어느 부분은 병들고 어느 부분은 건강한 것이니, 몸과 마음이 어찌 한쪽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형제를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같은 부모의 자식을 사랑하지 아니 할 수 있겠는가? 형제가 만약 좋지 않은 행실이 있다면, 마땅히 정성을 계속하여 충심으로 간하여, 마땅히 점차 이치로서 깨우쳐서 〈형제가〉 감동 되어 깨우치기를 기약해야 하고, 갑자기 노여운 얼굴과 거슬리는 말을 건네서 형제간의 화목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루는 심하여 (장손부인의) 병이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모였는데, (장손부인이) 선언하기를 “이로써 신부의 은혜를 보답할 수 없다. 신부는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으니, 모두 신부처럼 효도하고 공경할 수 있기를 바라노니, 곧 최씨의 집안이 어찌 번창하고 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우령 하자평은 어머니상에 관직을 버리고 슬퍼하며 (몸을) 해치는 것이 예를 넘어서 매번 울고 뛰고, 갑자기 기절했다가 겨우 깨어나곤 하였다. 마침 명나라 말기에 동쪽 지역에 흉년이 들고 전쟁이 이어져 여덟 해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아침저녁으로 울부짖어 항상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를) 묶는 날과 같이하였으며, 겨울에는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나아가지 않았다. 하루에 쌀 몇 홉으로 죽을 만들고, 소금이나 채소도 (밥상에) 올리지 않았다. 지내는 바의 집이 무너져 바람이나 해도 가리지 못하자 형의 아들인 백홍이 (그를) 위하여 수리하고자 했으나 자평이 달가워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내 감정이 펴지지 못하고 있으니 천지의 한 죄인일 뿐이다. 집을 어찌 마땅히 덮겠는가?”
수창이 두 차례 군수가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어머니를 이유로 하여 하중부에 통판이 되었는데, 그 동복형제를 맞이하여서 돌아왔다. (함께) 지낸 지 몇 년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눈물 흘리며 울다가 거의 실명하게 되었다. 그 아우와 누이를 사랑하기를 더욱 돈독하게 하여 (그들을) 위하여 밭과 집을 사서 (그곳에) 살게 하였으며 그 종족에 대해서도 더욱 은혜로운 마음을 다하였다. 형제의 고아가 된 딸 두 사람을 시집보냈으며 그 장례 치르지 못한 사람 십여 초상을 장례 지냈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급암이 병이 많아 병이 장차 3개월에 이르렀다. 상이 일찍이 고(휴가)를 준 것이 여러 번이었는데, 끝내 낫지 않았다. 최후에는 엄조가 (그를) 위하여 고(휴가)를 청하였다. 상이 말하였다 “급암은 어떠한 사람인가?” (엄조가) 말하였다. “가령 급암이 직무를 맡아 관직에 있다면 이로써 다른 사람보다 낫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린 군주를 도와 왕업을 지키는 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스스로 맹분, 하육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절개를) 빼앗거나 무너트릴 수 없을 것이다.” 상이 말하였다. “그렇다. 옛날에 사직의 신하가 있다고 하더니, 급암과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그것에) 가깝구나.”
대장군 청이 시중으로 있을 때 상이 평상에 걸터앉아 (그를) 보았으며, 승상 홍이 한가할 때 알현하면 상은 어떤 때는 관을 쓰지 않았으나, 가령 급암을 만나보는 이르러서는 관을 쓰지 않고서는 만나보지 않았다. 상이 일찍이 군막에 앉아 있었는데 급암이 앞으로 나와 일을 아뢰려 하였는데 상이 관을 쓰지 않고 있다가 급암을 바라보고 휘장으로 피하고서 사람을 시켜 그가 아뢴 것을 허락하였으니, 그가 공경과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다.
태자가 황제를 뵙고 말하였다. “고윤은 소심하고 삼가고 치밀하며 또 미천합니다. 제술은 최호를 통한 것이니, 청컨대 그의 죽음을 사면해주십시오.” 황제가 고윤을 불러서 물어 말하였다. “국서는 모두 최호가 만든 것인가?” (최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이 최호와 함께 (그것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최호는 담당하고 있는 바의 일이 많으므로 총괄하여 결제하였을 뿐입니다. 저술하는 데 이르러서는 신이 최호보다 많이 하였습니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였다. “고윤의 죄가 최호보다 심하니, 어찌 이로써 살아날 수 있겠는가?” 태자가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하늘(황제)의 위엄이 엄중하시니 고윤은 낮은 신하이므로 혼미하고 어지러워서 순서를 잃었을 뿐입니다. 신이 예전에 물어보니, 모두 ‘최호가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고윤에게 물었다. “진실로 동궁(태자)가 말한 바와 같은가?” (고윤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의 죄는 마땅히 멸족해야 하니, 감히 허망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전하(태자)는 신이 모시고 강학한 날이 오래이기 때문에, 신을 불쌍히 여겨 그 살기를 빌고자 하였을 뿐일지언정, 실제는 신에게 묻지 않았고, 신 또한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감히 혼미하고 어지러워서가 아닙니다.
한나라 포선의 아내 환씨는 자가 소군이다, 포선이 일찍이 소군의 아버지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소군의) 아버지는 그의 청고함을 기특하게 여겨 딸로써 (그에게) 아내 삼아 주었는데, 실어 보내는 재물이 매우 성대하였다. 포선이 좋아하지 않으며 아내에게 말하였다. 소군이 부유하고 교만한 곳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꾸밈을 익혔는데, 나는 진실로 가난하고 천하니 예를 감당할 수 없다. 아내가 말하였다. “대인(아버지)이 선생(남편)이 덕을 닦고 검약을 지키는 것을 이유로 천첩으로 하여금 모시고 수건과 빗을 잡도록 하였습니다. 이미 군자(남편)를 받들게 되었으니 오직 명령을 이에 따를 뿐입니다.” 포선이 웃으며 말하였다. “능히 이와 같이 한다면 이것이 나의 뜻이다.” 아내가 이에 모시는 이와 의복과 장식품을 모두 돌려보내고, 짧은 삼베 치마로 바꾸어 입고 포선과 함께 녹거를 끌며 (포선의) 마을로 돌아와 시어머니에게 절하는 예를 마치고 물동이를 들고 나가 물을 길어 부인의 도를 닦아 행하니 시골과 고을에서는 (그를) 칭찬하였다.
어떤 사람이 () 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가벼운 먼지가 연약한 풀에 깃드는 것과 같을 뿐이다. 어찌 괴롭게 지내는 것을 이에 이와 같이 하는가? 게다가 남편의 집안이 멸망하여 이미 없어졌으니 이것(절개)을 지키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하고자 하는가?” 영녀가 말하였다. 들으니, ‘인자는 성쇠로써 절개를 고치지 않고, 의자는 존망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조씨가 온전하고 성했던 시절에도 오히려 보존하여 마치고자 하였을 터인데 하물며 지금 쇠하고 망하였으니, 어찌 차마 (그것을) 버리겠는가? 금수의 행동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진나라 함녕 연간에 큰 전염병이 나서 유곤의 두 형이 모두 죽고 다음 형인 유비도 다시 위태해져서 병세가 막 치성하였으므로 부모와 여러 아우들 모두 나가서 (집) 밖에서 머물렀는데, 유곤만 남아 떠나지 않았다. 여러 부형이 (그에게) 강요하자이에 “저(곤)는 본성이 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고 마침내 친히 스스로 (형을) 부축하고 아침 저녁으로 잠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다시 관을 어루만지며 슬프게 임함을 그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십 여순에 병세가 이미 수그러들어 집안 사람이 마침내 돌아오니 유비의 병세가 쾌차하였고 유곤 또한 병이 없었다.
양파의 가문은 대대로 순후하여 모두 의리와 겸양을 돈독히 하여 형제가 서로 섬기기를 부자 같음이 있었다. 양춘과 양진은 공손하고 겸손하여 형제가 아침에 곧 대청에 모여서 날을 마치도록 서로 마주하여 일찍이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한 가지라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형제들이) 모이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대청 사이에 왕왕 휘장으로 사이를 막아 자거나 쉬는 곳으로 삼고는 때로 나아가 쉬고 누우며 돌아와 함께 담소하곤 하였다.
당나라 영공 이적은 귀하기가 복야가 되었는데도 그 누이가 병을 앓으면 반드시 직접 〈누이를〉 위하여 불을 피워 죽을 끓였다. 불에 그 수염을 태우자 누이가 말하였다. “종과 첩이 많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 고생하는 것이 이와 같은가? 이적이 말하였다. “어찌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는가? 다만 지금 누이의 나이가 늙었고 저(적) 또한 늙었으니 비록 자주 누님을 위하여 죽을 끓이고 싶어도, 다시 할 수 있겠는가?”
사마온공은 그 형 백강과 우애가 특별히 돈독하였다. 백강이 나이가 장차 80이 되려는데, 온공이 (그를) 엄한 아버지처럼 받들었고 (그를) 어린아이처럼 돌보아서 매양 밥을 먹고 조금 지나서 곧 물어 말하기를 “배고픔이 없습니까? 하고 날씨가 조금 추워지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옷이 얇지는 않습니까?
근세의 고가 중에 오직 조씨 가문만이 이도가 거듭 자제에게 훈계한 것을 인하여 모두 법도가 있었다. 모여 살면서 서로 부를 적에 외성의 존장에게는 반드시 “무슨 성 몇 째 아저씨 혹 형” 이라 하고 여러 고모와 대고모의 남편에게는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개 성 고모부, 아무개 성 대고모부"라 하여 일찍이 감히 자를 부르지 않았다. 그 부당의 교유를 말할 때는 반드시 “아무개 성 몇 째 어른” 이라 하고 또한 일찍이 감히 자를 부르지 않았다. 당시의 고가와 구족이 모두 이와 같이 하지 못하였다.
상이 때때로 집안에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리고 먹어 임금의 앞에 있는 듯하였으며 그 상례를 집행함에 슬퍼함이 심하니 자손들도 가르침을 따라 또한 (그) 처럼 하였다. 만석군의 집은 효성과 삼감으로 군국에 알려졌다. 비록 제나라와 노나라의 여러 유학자들도 질박한 행실을 모두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내사 경이 취해 돌아와서 바깥 문으로 들어와서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았다. 만석군은 (그것을) 듣고 먹지 않으니 경은 두려워하여 어깨를 드러내고 사죄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종족과 형 건도 어깨를 드러내자 만석군이 꾸짓으며 말하였다. “내사는 귀한 사람이니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 안의 어른도 모두 달아나 숨는데 내사는 수레 속에 앉아 그대로 있으니 진실로 마땅하도다." 하고 이에 경을 타일러 보냈다. 경과 모든 아들은 이문에 들어오면 종종걸음으로 집에 이르렀다.
방공이 일찍이 성부에 들어가지 않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였다. 유표가 (그를) 방문하자 방공이 밭두둑 위에서 밭갈기를 멈추었고, 처자는 앞에서 김매었다. 유표가 (처자를) 가리키면서 물어 말하였다. 선생이 “농토에서 괴롭게 지내면서 관청의 녹봉을 즐기지 않으니, 후세에 무엇으로 자손에게 남겨주겠는가?” 방공이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위태로움을 남겨주는데, 지금 (나는) 유독 (그에게) 편안함을 남겨줍니다. 비록 남겨준 것이 같지 않더라도 남겨주는 것이 없는 아닙니다.” 유표가 탄식하며 떠났다.
효분의 숙부 진이 이미 죽고 난 뒤에 효분 등은 숙모 이씨를 받들되 낳아준 바를 섬기듯이 하여 아침저녁으로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드리며 나가고 들어올 때 아뢰고 뵈었으며 집안일의 크고 작은 것을 한결같이 물어서 결정하였다. 매번 형제가 출행하다가 한 척, 한 자 이상의 것을 얻은 것이 있으면 모두 이씨의 창고에 넣고 사시에 나누어 주는 일을 이씨가 스스로 (그것을) 재량하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20여 년이었다.
고모와 자매와 조카딸 중에 고아나 과부된 사람이 있으면 비록 소원한 관계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위하여 사윗감을 가려서 (그를) 시집보냈는데, 모두 나무를 조각한 화장대와 매듭 무늬의 비단을 사용하여 혼수품으로 삼았다. (유공작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혼수품이 풍요롭게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시집가는 것이 때를 잃지 않는 것과 같겠는가?" 하였다.
공작이 돌아가심에 이르러서 중영이 한결같이 그 법을 따라 공권을 섬기면서 공작을 섬기는 것처럼 하였다. 심한 병이 아니면 공권을 만날 적에 일찍이 띠를 묶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경조윤과 염철사가 되어 외출하다가 공권을 통하는 거리에서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홀을 단정하게 하고 서서 공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이에 말에 올랐으며 공권이 늦게 돌아오면 반드시 띠를 묶고 말 머리에서 마중하였다. 공권은 자주 이로써 (그만두라고) 말하였으나, 중영은 끝내 관직이 현달한 것 때문에 조금도 바뀌는 것이 있지 않았다.
유관은 비록 창졸간에 처하더라도 일찍이 말을 빨리하거나 낯빛을 급히 하지 않았다. 부인이 유관을 시험하여 성내게 하기를 바랐다. 엿보아 조회에 이르러 꾸밈을 이미 마칠 때 계집종으로 하여금 고깃국을 받들어 올리다가 엎어서 조복을 더럽히게 하였다. 계집종이 급히 (그것을) 거두자 유관은 신색을 달리하지 않고 이에 말을 천천히 하며 이르기를 “국에 너의 손을 데었는가?" 하니 그의 성품과 도량이 이와 같았다.
왕발·양형·노조린·낙빈왕이 모두 문학으로 명성이 있어서 그들을 사걸이라 일렀는데, 배행검이 〈그들을 평하여〉 말하였다. “선비가 원대함에 이르는 것은 도량과 식견을 우선시하고 문예를 뒤로하니, 왕발 등이 비록 글재주가 있으나 경솔하고 조급하며 얕아서 속을 드러내니, 어찌 작위와 봉록을 누릴 만한 그릇이겠는가? 양자는 침착하고 안정되니 마땅히 수령의 지위를 얻겠지만, 나머지는 좋은 죽음을 얻으면 다행이다.” 그 뒤에 왕발은 남해에 빠져 죽고, 조린은 영수에 투신하고, 낙빈왕은 처형을 당하고, 양형은 영천의 수령으로 마쳐 모두 배형검의 말과 같았다.
그 윗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대함에 한결같이 스스로 믿음으로서 하여, 이익과 해로움을 가려서 나아가거나 버리지 (생략) 않았으며, 그 하는 바가 있을 때 반드시 그 방법을 다하면서 말하였다. “나로부터 (생략) 하는 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 그 성공함과 (성공하지) 못함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이 있다. 비록 성현이라도 기필할 수 없으니, 내 어찌 구차히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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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道先生이 終日端坐에如泥塑人이러시니 及至接人하여는 則渾是一團和氣러시다<小學, 善行第六>
명도선생이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진흙으로 빚은 사람 같더니 사람을 접하는 것에 이름에 미쳐서는 곧 완전히 한 덩어리의 온화한 기운이었다.
장문절공이 재상이 되어 스스로 받듦이 하양의 장서기 일 때와 같았다. 친한 사람이 혹 (그를) 타일러 말하기를 지금 공은 받는 녹봉이 적지 않거늘 스스로 받듦이 이와 같으니, 비록 스스로 청렴하고 검약함을 믿더라도 바깥사람들은 자못 공손이 삼베 이불을 덮었던 비난을 하고 있다. 공은 마땅히 조금은 대중을 따르라.” 공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 지금의 봉급으로 비록 온 가족에게 비단옷과 진수성찬을 먹이더라도 어찌 할 수 없을까 걱정하겠는가? 다만 사람의 상정은, 검소함에서 사치함으로 들어가기는 쉽고 사치함에서 검소함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내 지금의 녹봉이 어찌 항상 있을 수 있으며, 몸이 어찌 항상 보존될 수 있겠는가? 하루아침에 지금과 달라지면 집안 사람들은 익힌 지 사치를 이미 오래되어서 갑자기 검소할 수 없어 반드시 (살고) 있는 곳을 잃는 상황에 이를 것이니, 어찌 내가 있거나 벼슬에 떠나거나, 벼슬을 몸이 생존하거나 몸이 죽는 것을 하루처럼 하는 것만 같겠는가?”
63
嗟乎라 風俗頹弊如是하니 居位者 雖不能禁이나 忍助之乎아<小學, 善行第六>
아! 풍속이 퇴폐한 것이 이와 같으니, 지위에 있는 사람이 비록 금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차마 (그것을) 조장하겠는가?”
64
子曰 吾未見好德을如好色者也로라<四書독해첩경, 論語>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덕을 좋아하는 것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다.”
65
子曰 吾未見好德을如好色者也로라<論語, 子罕第九>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덕을 좋아하는 것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다.”
66
子曰 桓公이 九合諸侯호되 不以兵車는 管仲之力也니如其仁 如其仁이리오<論語, 憲問第十四>
공자가 말하였다. “환공(桓公)이 제후들을 규합하되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管仲)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
등(滕)나라 문공(文公)이 물어 말하였다. “등은 작은 나라입니다. 힘을 다하여 대국을 섬기더라도 침략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옛날에 태왕(太王)이 빈 땅에 살 적에 적인(狄人)이 그곳을 침략하자, 가죽과 비단으로 적인을 섬겨도 침략을 벗어날 수 없었고, 개와 말로 적인을 섬겨도 침략을 벗어날 수 없었고, 주옥으로 적인을 섬겨도 침략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그 기로(耆老)들을 불러모아서 그들에게 고하여 말하길, ‘적인이 원하는 것은 나의 토지이다. 내 이에 관하여 들으니, 「군자는 그 사람을 기르는 것 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하니 그대들은 어찌 임금이 없을까를 근심하는가? 나는 장차 빈 땅을 떠나겠소.’ 하고 빈 땅을 떠나 양산(耆老)을 넘어 기산(岐山)의 아래에 도읍을 정하여 그곳에 거주하셨습니다. 빈땅 사람들이 말하길, ‘어진 사람이다. 잃어서는 안된다.’ 하고 태왕을 따르는 자가 마치 저자로 모이는 듯 〈많았습니다〉.
현명한 사람을 만나고자 하면서 올바른 도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가 들어오길 바라면서 그 문을 닫는 것과 같다네. 무릇 의리는 길이고 예는 문이니, 오직 군자만이 이 길을 경유하고 이 문을 출입할수 있다네. 《시경》 〈대동(大東)〉에 이르길, ‘큰 길은 숫돌과 같으니, 그 곧음은 화살과 같다. 군자가 밟는 것이고, 소인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네.”
지극히 성실한 도(道)로는 미리 〈조짐을 보아〉 알 수 있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 할 때는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할 때는 반드시 불길한 징조가 있어서, 시초점과 거북점에 나타나며 사지를 움직이는 데 〈나타나므로,〉 재앙과 행복이 장차 이르려 할 때에, 좋은 일을 반드시 미리 알고 좋지 못할 일을 반드시 미리 알게 된다. 그러므로 지극히 성실한 것은 귀신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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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語云 從善如登이요 從惡如崩이라<原本明心寶鑑, 繼善篇第一
>
《국어(國語)》 〈〈주어(周語)〉에〉 이르길, “선을 따르기는 올라가는 것같이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무너지는 것같이 〈쉽다〉.” 하였다.
《동악성제수훈(東嶽聖帝垂訓)》에 말하였다. “하루를 선(善)을 행하면 복이 비록 아직 이르지 않더라도 재앙이 저절로 멀어지고, 하루 악을 행하면 재앙이 비록 아직 이르지 않더라도 복이 저절로 멀어지니, 선을 행하는 사람은 봄 동산의 풀과 같아서 그 자라남을 보지 못하나 날마다 더해지는 것이 있고, 악(惡)을 행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돌(숯돌)과 같아서 그 닳는 것을 보지 못하나 날마다 줄어드는 것이 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꾸짖더라도 선한 사람은 모두 대꾸하지 않아야 한다. 선한 사람이 만약 다시 꾸짖으면 서로 지혜가 없는 〈사람이 될 것이요〉, 대꾸하지 않으면 〈선한 사람은〉 마음이 맑아지고, 꾸짖은 사람만 입에 열이 날 것이니, 바로 〈이것은〉 사람이 하늘에 침을 뱉으면 다시 자신을 좇아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