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섯째는 글솜씨를 익히고 거문고 타고 술마시는 것을 일삼아서 한가롭게 놀면서 세월을 보내며 스스로 운치있다고 말하는 것이요, 그 여섯째는 한가한 사람을 모아서 바둑을 두고 장기를 두는 것을 좋아하여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다만 다투는 데에 빠지는 것이요, 그 일곱째는 부유함과 귀함을 부러워하고 가난함과 천함을 싫어하여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요, 그 여덟째는 기호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끊고 억제할 수 없어서 재물과 이권, 음악과 여색의 그 맛을 단수수처럼 〈여기는 것이다.〉
닭처럼 울고 개처럼 훔치다 : 진나라 왕[소양왕(昭襄王)]이 맹상군(孟嘗君)이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 경양군(涇陽君)에게 제나라에 볼모가 되게 하여 청하니, 맹상군이 진나라에 찾아왔다. 진나라 왕이 그를 승상으로 삼으니, 어떤 사람이 진나라 왕에게 말하길, “맹상군이 진나라에 재상을 맡으면 반드시 제나라를 우선시하고 진나라를 뒤로할 것이니, 진나라가 분명 위태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찍다 : 장승요(張僧繇)가 금릉(金陵)의 안락사(安樂寺)에서 벽에 용 네 마리를 그리면서 눈동자를 찍지 않았다. 〈물을 때마다〉 늘 말하길, “용에 점을 찍으면 날아가 버릴 것이오.” 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거짓말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에 점을 찍으니, 잠시 뒤에 천둥과 번개가 벽을 부수었고, 한 마리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눈에 점을 찍지 않은 것은 모두 남아 있었다.
악기에 말하였다. 돼지를 길러 잡고 술을 만드는 것이 그것으로 화를 만듦이 아니지마는 옥송이 더욱 많아짐은 술의 유폐가 화를 낳아서이다. 이런 까닭으로 선왕이 인하여 주례를 만들어서 한번 (술을) 올리는 예에 손님과 주인이 백 번 절하여, 날을 마치도록 술을 마시면서도 취할 수 없게 하였다. 이는 선왕이 이로써 술의 화에 대비한 것이다.
조나라 양자가 지백을 죽이고 그 머리(뼈)에 옻칠하여 음료수 그릇으로 삼았다. 지백의 신하 예양이 (그를) 위해 원수를 갚고자 하여, 이에 거짓으로 벌 받는 사람이 되어 비수를 끼고 양자의 궁중에 들어가 뒷간을 칠하였는데, 좌우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양자가 말하였다. 지백이 죽고 후사도 없는데 이 사람이 (그를) 위해 원수를 갚고자 하니, 참으로 의로운 선비이다. 내가 삼가 (그를) 피할 뿐이다.
최현위의 어머니 노씨가 일찍이 현위를 훈계하며 말하였다. 내가 이종 오빠인 둔전낭중 신현어를 보니, (이종 오빠가) 말하기를 “아들로서 벼슬에 종사하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 와서 ‘가난하고 궁핍하여 생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좋은 소식이다, 만약 듣기에 재화가 충족하며 옷과 말이 가볍고 살쪘다고 하면 이는 나쁜 소식이다.’ 라고 하니 나는 일찍이 이로써 확론이라고 여긴다." 하였다.
상이 때때로 집안에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리고 먹어 임금의 앞에 있는 듯하였으며 그 상례를 집행함에 슬퍼함이 심하니 자손들도 가르침을 따라 또한 (그) 처럼 하였다. 만석군의 집은 효성과 삼감으로 군국에 알려졌다. 비록 제나라와 노나라의 여러 유학자들도 질박한 행실을 모두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큰아들 건은 낭중령이 되고 작은아들 경은 내사가 되었는데, 건은 늙어서 머리가 희었으나 만석군은 여전히 병이 없었다. 5일마다 목욕하는 휴가를 받아 돌아와서 찾아뵙고 직접 딸린 방으로 들어와 가만히 모시는 사람에게 물어 어버이의 내의와 속적삼을 가져다가 몸소 스스로 빨아 다시 모시는 사람에게 주었다. 감히 만석군으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지 않아 이로써 일정함으로 삼았다.
장공예는 9대가 함께 지내니, 북제와 수나라, 당나라에서 모두 그의 문에 정표하였다. 인덕 연간에 고종이 태산에 봉제사를 지내고 그 집에 행차하여 공예를 불러 보고는 그가 이로써 종족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바의 도를 물었다. 공예가 종이와 붓으로 대답겠다고 청하고는 마침내 ‘참을 인‘자 백여 번을 써서 올렸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종족이 화목하지 않은 까닭은 존장의 옷과 음식에 혹 고르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며, 낮고 어린 사람의 예절이 혹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며, 번갈아가며 서로 책망하여 마침내 어긋나고 다투게 되기 때문이니, 진실로 서로 더불어 (그것을) 참을 수 있다면 집안의 도가 화목할 것입니다.’
근일 사대부 집안은 술은 내법이 아니며, 과일은 먼 지역의 진귀하고 특이한 것이 아니며, 음식은 여러 물품이 아니며, 그릇이 상에 가득하지 않으면 감히 빈객과 친구를 모으지 못하며, 항상 몇 날을 장만하여 모은 연후에 감히 (초청하는) 글을 낸다. 만일 혹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것을) 비난하여 이로써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속을 따라 사치하고 화려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30
楚書曰 楚國은 無以爲寶요 惟善을以爲寶라하니라<四書독해첩경, 大學>
《국어(國語)》 〈초어(楚語)〉에 이르길, “초(楚)나라는 보배로 삼는 것이 없고, 오직 선(善)한 사람을 보배로 여긴다.” 하였다.
31
舅犯曰 亡人은 無以爲寶요 仁親을以爲寶라하니라<四書독해첩경, 大學>
〈진 문공(晉文公)의〉 외숙 범(犯)이 말하길, “도망 중인 사람[亡人]은 보배로 삼을 것이 없고, 어버이 사랑하는 것[仁親]을 보배로 삼는다.” 하였다.
32
子曰 事君盡禮를 人이以爲諂也로다<四書독해첩경, 論語>
공자가 말하였다. “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하는 것 사람들이 그것을 아첨한다고 말하는구나.”
33
仁以爲己任이니 不亦重乎아 死而後已니 不亦遠乎아<四書독해첩경, 論語>
인(仁)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 그치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제선왕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그것이 큽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백성이 오히려 그것을 작다고 생각합니다.” 〈제선왕이〉 말하였다. “과인의 동산은 사방 사십리인데 백성이 오히려 그것을 크다고 생각함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문왕의 동산은 사방 칠십리인데, 꼴 베고 나무 하는 사람이 그곳으로 가며, 꿩 잡고 토끼 잡는 사람이 그곳으로 가서, 백성과 그것을 함께하였으니, 백성이 그것을 작다고 생각함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반드시 의를 일삼음이 있더라도 기대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 말며, 조장하지 말아서 마치 송나라 사람처럼 하지 말아야 하네. 송나라 사람 중에 제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근심하여 새싹을 뽑아 올린 자가 있었네. 허겁지겁 〈집에〉 돌아와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피곤하오. 내가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왔소.’ 하자, 그의 아들이 달려가서 그 싹을 보았더니 싹이 말라 있었다네. 〈이처럼〉 천하에 싹이 자라는 것을 돕지 않는 자가 적다네. 이로움이 없다고 여겨서 싹을 버려두는 자는 싹을 김매지 않는 자이고, 싹이 자라기를 돕는 자는 싹을 뽑은 자이니, 다만 이로움이 없을 뿐 아니고 또 싹을 해치는 것이네.
맹자가 말하였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우산이 큰 도성에 근교(近郊)이기 때문에 도끼로 나무를 벌목하였으니, 아름답게 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대체로 그곳에서 밤낮으로 자라는 까닭과 비와 이슬이 적셔준 까닭에 새싹이 우산에서 생겨나고 있었지만, 소와 양까지 또 우산에 풀어놓고서 길렀[放牧]으니, 이 때문에 저처럼 민둥민둥[濯濯]한 것인데, 사람들은 우산이 민둥민둥한 것을 보고서 ‘일찍이 우산에는 재목(材木)이 없었다.’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시경》 〈벌가(伐柯)〉에 이르길 ‘도끼자루를 베는데, 그 기준은 멀지 않다.’고 하니, 도끼자루를 잡고서 도끼자루를 베는데, 눈을 흘기고 자루를 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멀다고 여기니,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의 도로써 사람을 다스리다가 〈잘못을〉 고치면 〈다스림을〉 그만둔다.
38
楚書曰 楚國은 無以爲寶요 惟善을以爲寶라하니라<大學, 傳>
《국어(國語)》 〈초어(楚語)〉 이르길 “초(楚)나라는 보배로 삼는 것이 없고, 오직 선(善)한 사람을 보배로 여긴다.” 하였다.
39
舅犯曰 亡人은 無以爲寶요 仁親을以爲寶라하니라<大學, 傳>
〈진 문공(晉文公)의〉 외숙인 범(犯)이 말하길 “도망 중인 사람[亡人]은 보배로 삼을 것이 없고, 어버이 사랑하는 것[仁親]을 보배로 삼는다.” 하였다.
한 사람이라도 총명하고 지혜로워 제 본성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그들 사이에서 나온다면, 하늘은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억조 백성의 군주로 삼아서 그로 하여금 백성들을 다스리고 가르쳐서 그 본성을 회복시키게 하였으니, 이것은 복희·신농·황제·요·순이 천명을 계승하여 〈교육의〉 표준을 세운 까닭이요, 사도의 관직과 전악의 관직을 설치한 이유였다.
〈제선왕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그것이 큽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백성이 오히려 그것을 작다고 생각합니다.” 〈제선왕이〉 말하였다. “과인의 동산은 사방 사십리인데 백성이 오히려 그것을 크다고 생각함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문왕의 동산은 사방 칠십리인데, 꼴 베고 나무 하는 사람이 그곳으로 가며, 꿩 잡고 토끼 잡는 사람이 그곳으로 가서, 백성과 그것을 함께하였으니, 백성이 그것을 작다고 생각함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처음 국경에 이르러 나라가 크게 금하는 일을 물은 뒤에 감히 들어왔습니다. 신이 들으니, ‘교관의 안에 동산이 사방 사십 리가 있는데, 그 고라니와 사슴을 죽인 사람을 살인한 죄와 같이한다’ 하니, 그렇다면 이는 사방 사십 리로 나라 안에 함정을 만든 것이니, 백성이 그것을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보고 말하였다. “큰 궁궐을 만들려면 반드시 도목수(都木手)로 하여금 큰 나무를 구하게 하실 것이니, 도목수가 큰 나무를 얻으면 왕께서 기뻐하여 그 임무를 다할 수 있다 여기고, 장인이 그 나무를 깎아서 작게 하면 왕이 노하여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어려서 도를 배우는 것은 장성하여 배운 것을 행하고자 하는 것인데, 왕께서 ‘우선 네가 배운 것을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연(燕)나라가 자기 백성을 학대하는데 왕이 가서 거기를 정벌하니, 백성이 장차 자신을 물과 불의 가운데에서 구원하리라 여겨서 대바구니 밥과 호리병의 장물로써 왕의 군대를 맞이하였는데, 만일 그 부형을 죽이고 그 자제를 구속하고 그 종묘를 부수고 그 중요한 기물들을 옮겨간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천하가 진실로 제(齊)나라의 강함을 두려워하는데 지금 또 땅을 배로 하고 어진 정사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천하의 군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반드시 의를 일삼음이 있더라도 기대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 말며, 조장하지 말아서 마치 송나라 사람처럼 하지 말아야 하네. 송나라 사람 중에 제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근심하여 새싹을 뽑아 올린 자가 있었네. 허겁지겁 〈집에〉 돌아와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피곤하오. 내가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왔소.’ 하자, 그의 아들이 달려가서 그 싹을 보았더니 싹이 말라 있었다네. 〈이처럼〉 천하에 싹이 자라는 것을 돕지 않는 자가 적다네. 이로움이 없다고 여겨서 싹을 버려두는 자는 싹을 김매지 않는 자이고, 싹이 자라기를 돕는 자는 싹을 뽑은 자이니, 다만 이로움이 없을 뿐 아니고 또 싹을 해치는 것이네.
진가(陳賈)가 말하였다. “왕은 그것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왕은 스스로 주공과 누가 어질고 또 지혜롭다고 여기십니까?” 왕이 말하였다. “아, 이 무슨 말인가?” 〈진가가〉 말하였다. “주공이 관숙(管叔)에게 은(殷)나라를 감독하게 했는데 관숙은 은나라로써 배반하였으니, 〈주공이〉 알고서 그에게 시켰으면 이는 어질지 못한 것이고, 알지 못하고서 그에게 시켰다면 이는 지혜롭지 않은 것입니다. 인과 지는 주공도 그것을 다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왕에 있어서랴? 제가 〈맹자를〉 만나보고 그 일을 해명하겠습니다.”
신농의 말을 하는 농가자(農家者) 허행(許行)이 있었다. 초나라에서 등나라로 가서 궐문에 이르러서 문공(文公)에게 고하였다. “먼 지방의 사람이 ‘임금께서 인정(仁政)을 시행한다.’고 듣었습니다. 전(廛) 하나를 받아서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문공이 허행에게 거처를 주니 그의 무리 수십 인이 모두 갈옷을 입고 신발을 삼고 자리를 짜면서 양식을 마련하였다.
다른 날에 〈이지(夷之)가〉 또 맹자를 만나기를 요구하자, 맹자가 말하였다. “내가 지금은 〈이자를〉 만날 수 있네. 직언하지 않으면 〈우리의〉 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니, 나는 장차 그에게 직언하겠네. 내가 듣기에, 이자는 묵가(墨家)라 하니, 묵가가 상을 치루는 것은 검소함을 바른 도로 여긴다네. 이자는 검소함으로 천하를 바꾸겠다 생각하니, 어찌 검소함을 옳지 않다고 여겨서 중시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자는 자기 어버이를 장례 지낸 것이 후하였으니 이것은 천하게 〈여기는〉 것으로 부모를 섬긴 것이네.”
서자(서벽)가 이 일을 이자(이지)에게 말하자, 이자가 말하였다. “유가(儒家)의 말 《서경》 〈강고(康誥)〉에 ‘옛날의 사람(왕)은 갓난아이를 돌보듯 한다.’ 하였으니, 이 말은 무엇을 이르는 것이겠는가? 나(이지)는 곧 이 말의 뜻을 ‘사랑에는 차등이 없고 〈사랑을〉 베푸는 일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한다.’라고 생각한다.” 서자가 이자의 말로 맹자에게 고하자, 맹자가 말하였다. “저 이자는 진실로 ‘사람이 제 형의 자식을 친히 하는 것이 제 이웃의 갓난아이를 친히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서경》의〉 저 말은 다음을 취한 것이 있으니, 〈그 뜻은 바로〉 ‘갓난아이가 기어서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은 갓난아이의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사람으로 하여금 뿌리(부모)를 하나로 하였는데, 이자는 뿌리를 둘로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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舜이 不告而娶는 爲無後也시니 君子以爲猶告也라하니라<孟子, 離婁上>
순(舜)이 아뢰지 않고 장가든 것은 후손이 없기 때문이니, 군자는 이를 아뢴 것과 같다고 한다.”
저 장자(章子)가 어찌 남편과 아내, 자식과 어미의 가족을 가지고자 하지 않았겠는가? 아버지에게 죄를 얻었기 때문에 가까이할 수 없었네. 아내를 내보내고 자식을 물리쳐서 생을 마치도록 그들에게 봉양 받지 않았으니, 그가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이처럼 하지 않으면 이는 죄 중에 큰 것이다.’라고 여겼으니, 이런 사람이 곧 장자라네.”
맹자가 말하였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우산이 큰 도성에 근교(近郊)이기 때문에 도끼로 나무를 벌목하였으니, 아름답게 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대체로 그곳에서 밤낮으로 자라는 까닭과 비와 이슬이 적셔준 까닭에 새싹이 우산에서 생겨나고 있었지만, 소와 양까지 또 우산에 풀어놓고서 길렀[放牧]으니, 이 때문에 저처럼 민둥민둥[濯濯]한 것인데, 사람들은 우산이 민둥민둥한 것을 보고서 ‘일찍이 우산에는 재목(材木)이 없었다.’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시경》 〈벌가(伐柯)〉에 이르길 ‘도끼자루를 베는데, 그 기준은 멀지 않다.’고 하니, 도끼자루를 잡고서 도끼자루를 베는데, 눈을 흘기고 자루를 보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멀다고 여기니,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의 도로써 사람을 다스리다가 〈잘못을〉 고치면 〈다스림을〉 그만둔다.
신이 들으니, ‘관리들이 객경을 내쫓고자 의논한다.’ 하는데, 〈신(臣)은〉 감히 그 일을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옛날에 목공은 선비를 구하되, 서쪽으로는 융(戎) 땅에서 유여를 취하였고, 동으로는 완 땅에서 백리해를 얻었고, 송에서 건숙을 맞이하였고, 진에서 비표와 공손지를 불러왔으니, 이 다섯 사람은 진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목공이 그들을 등용하여 20개 국을 병합하여, 결국 서융에서 패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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楚書曰 楚國은 無以爲寶요 惟善을以爲寶라하니라<原本明心寶鑑, 繼善篇第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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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楚書)에 말하였다. “초(楚)나라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고, 오직 선(善)을 보배로 여긴다.”